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 헌법 (문단 편집) == 역사 == 미국 연방 헌법은 [[미국 독립 전쟁|독립 전쟁]] 중인 [[1776년]] 작성된 '버지니아 권리장전', 이를 토대로 채택된 '버지니아주 헌법' 및 동년 필라델피아 대륙회의에서 발표된 '[[미국 독립선언서|독립선언서]]' 등의 영향을 받아 [[천부인권]] 옹호와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정당한 권리 행사라는 핵심적 가치를 참고하였으며, 그 직접적인 전신은 [[1777년]] 대륙회의에서 결정하여 [[1781년]]부터 효력이 발생한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 and Perpetual Union, 연합과 영속적인 연방에 관한 규약)'이라 할 수 있다. [[13개 식민지]]는 본래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었지만, 여러 통일국가가 탄생하는 당대 상황에 비추어 대표성 있는 주권국으로 공인받고 영국 등의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3개 식민지 전체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국가연합]]으로 행동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위해 1778년에 연합의 헌법 역할을 하는 연합규약을 제정했다. 연합규약은 [[1781년]]에 모든 주의 비준을 받았으며, 연합규약에 따라 이러한 국가연합에서 각 주를 대표할 수 있는 의회를 구성했다. 이것이 연합의회(Congress of the Confederation)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600px-Thirteen_Colonies_Original_Highlighted.svg.png|width=100%]]}}}|| ||<:>{{{-1 미국 연방의 초기 구성원이 된 13개 식민지.}}} || 그러나 [[1783년]]에 영국이 [[파리 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자, [[13개 식민지]]는 곧바로 분열을 겪었다. 이전에는 영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개별 주의 이권을 유보해 왔다면, 영국이 물러간 뒤에는 아메리카 내부의 문제를 두고 갈등이 점화된 것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당시 미국은 연합된 입법부만 존재하고 연합된 행정부는 없는 상황이라 법을 제정해도 이를 각 주 모두에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특히 독립전쟁을 수행하면서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의 강대국들에게 막대한 빚을 짊어진 상황이었기에, 개별 주의 독자행동은 미국 전체의 신용을 악화시키는 큰 문제가 되었다. 연합의회는 힘이 없어서 돈 갚을 여력도 없는데 각 주 정부들은 이러한 빚에 대해 자기 일 아니라며 무시한 것. 합의는 통상과 세금 문제를 놓고 대표간의 의견 충돌로 번번이 무산되었는데, 연합의 법을 집행하기 위한 조직체계부터 우선적으로 개편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이에 [[로드아일랜드]]의 1개주를 제외[* 면적이 가장 작고 전통이 강하여, 연합이 정부를 갖추고 비대해지면 주의 독립된 권리를 침해할 것을 두려워했으며, 특히 징세 및 통상 조항으로 인해 연합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빼앗길 것이라 생각하여 반발했다. 이 때문에 초기 13개 식민지 출신 주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헌법을 비준한 주가 되었다. 뒤늦게나마 헌법을 비준하게 된 이유는 이미 헌법을 비준한 다른 주들이 어서 비준하지 않으면 폭탄 [[관세]]를 때려버리겠다고 협박해서.(...) 결국 다른 주들에게 권리장전을 수정헌법으로 추가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헌법을 비준하였다.]한 12개주의 대표들은 1785년에서 1787년 사이 여러 차례 연합규약의 수정을 논의하다가, 결국 기존의 연합규약을 전면 개정하여 새 헌법을 제정하는 것에 동의했다. 1787년 5월 25일 첫 제헌 회의가 열렸으며, 의장으로 전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이 선출되었다. 9월까지 여러가지 헌법 초안들이 제시되었다.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회관(현재의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 모인 39명의 대표들은 완성된 헌법에 서명하고 이를 연합의회에 송부하였다. 의회는 9월 28일 이를 승인했으나, 헌법이 발효되기 위해서는 13개주의 2/3에 해당하는 9개주 이상의 비준이 필요했다. [[델라웨어주]]가 1787년 12월 7일 처음으로 이를 비준하였으며, [[뉴햄프셔주]]가 [[1788년]] [[6월 21일]]에 9번째로 비준하면서 조건이 달성되었다. 연방 헌법은 [[1789년]] [[3월 4일]]부터 공식적으로 발효되었는데, 발효가 연기된 것은 정치, 경제적 중심지였던 [[버지니아주]]와 [[뉴욕주]]에서 비준이 늦어졌기 때문에 이를 고려한 것이다. 로드아일랜드의 사례와 같이 당시 미국 헌법의 비준, 즉 연방 가입을 놓고 각 주 내부에서도 '우리 주가 연방에 가입해야 하나?', '미국이라는 거대정부를 만들고 여기에 권리를 위임해야 하나?'에 대해 사상가들의 의견이 갈렸는데, 특히 뉴욕과 같은 대형주가 가입을 거부할 경우 연방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지거나 또다른 갈등의 불씨가 생길 수 있었다.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것은 '새 헌법 조항이 국방, 상업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연방정부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이에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는 헌법 비준을 독려하기 위한 논문집 '[[https://guides.loc.gov/federalist-papers/full-text|연방주의자(The Federalist)]]'를 발표하여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대표성 있는 연방국가의 중요성',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행정기구의 필요성', '연방의회의 법률을 심의할 사법기구의 필요성', '삼권분립의 중요성', '각 주간의 충돌을 조정하고 힘의 균형을 조율할 체계의 필요성' 등을 이유로 들었고, 시민들과 의회를 설득하여 결국에는 13개 주 모두가 연방에 가입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 논문집은 현재까지도 미국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제헌의회 당시, 5월과 9월 사이 총 55명의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제헌에 참여했으나 실제로 9월 17일 서명에 참여한 인물들은 39명이다. 주 대표 3명(버지니아 주 대표 2명, 매사추세츠 주 대표 1명)은 서명을 거부했다. 이유는 완성된 헌법전이 '결함 있는 문서(flawed document)'라 생각되어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른 13명은 아예 9월 17일 서명식에 불참했다. [[https://constitutioncenter.org/learn/educational-resources/founding-fathers|#]]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